본문 : 로마서 8:18-25

18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19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20 피조물이 허무에 굴복했지만, 그것은 자의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굴복하게 하신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은 남아 있습니다.
21 그것은 곧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22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23 그뿐만 아니라,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24 우리는 이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25 그러나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 참으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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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을 보면 계속해서 반복되는 핵심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기다림, 고대함입니다. 19절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23절 “우리의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25절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 참으면서 기다려야 합니다”사도 바울은 피조물들이라고 넓게 말하고 있지만 좁게 좁히면 바로 예수 믿는 우리들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피조물들, 우리들이 어떠한 상황에 있느냐를 18절에 ‘고난을 겪고 있다’20절에 ‘허무함속에 살고 있다’ 21절에 ‘썩어짐의 종살이 속에 살고 있다’ 22절에 ‘신음하며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의 삶을 자세히 돌아보면, 영적인 눈으로 보면 죄와 사망, 사단의 권세 아래에서 고난을 받고, 핍박을 받고, 유혹과 억눌림을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살아가면서 순간 순간 “이것이 정말 인생인가? 이렇게 사는 것이 의미가 있나?”라는 질문이 영혼 깊은 곳에서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하게, 가장 많은 것을 누렸다고 하는 솔로몬 왕이 인생을 돌아보며 했던 말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도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많이 소유하고, 가장 좋은 것을 다 누려 보았지만 기쁨보다 눈물이 많고, 쉼보다 고생이 많은 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자유한 인생, 행복한 인생이기 보다 무엇인가 눌리고, 쫒기고, 만족과 뿌듯하기보다 후회와 아픔이 많은 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전도서에서 분명하게 알려 줍니다.

우리가 또한 그것을 경험하며 삽니다. 우리 안에 영혼의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터져 나옵니다. 그런 우리들의 영혼의 모습을 사도 바울은 22-23절에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뿐만 아니라,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영혼이 이런 인생에서 벗어나 영광스러운 자유를 누리고 싶어 합니다.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우리 몸을 속량해 주실 것을 고대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찬양을 부르지 않습니까?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화는 저 하늘에 있네 저 천국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오 주님같은 친구 없도다 저 천국 없으면 난 어떻게 하나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자세히 보십시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성공한 사람, 성공하지 못한 사람, 잘 나가는 사람, 평범한 사람, 어떠한 사람들도 완전하게 만족하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가난하거나 평범한 사람 뿐 아니라 부자나 출세한 사람이나 성공한 사람 모두 만족을 느끼지 못합니다. 돈, 명예, 성공등으로 채워질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것만 가지면 채워지고 만족할 것 같지만 아무리 그것을 다 얻어도 허전함을 느낍니다.

게다가 인간은 무엇을 얻든지 오래가지 않아서 권태를 느낍니다. 아무리 갖고 싶은 것을 가지고 아무리 하고 싶은 것을 할지라도 곧 지루해집니다. 그런 존재가 인간입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채워지지 않는 지금 내가 가진 것, 지금 내가 하는 것 보다 더 높고 더 큰 것을 향한 아쉬움이 항상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물건을 사보십시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거기서 얻는 만족은 얼마가지 않습니다. 곧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텐데“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의 삶은 계속 그렇습니다. 아쉬움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가장 행복한 순간에도 “이것이 전부일까?” 라는 생각이 우리의 머릿속에 자리 잡습니다. 결혼, 자녀, 승진, 더 많은 돈, 새집. 좋긴 좋은데 이것이 전부인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큰 것을 사모하는 마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전도서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더 큰 것,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에 인간은 아무리 이 땅에서 좋은 것을 가지고 소유한다고 해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참된 만족, 완전한 만족은 이 땅이 아닌 저 하늘에서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신학자요 유명한 저술가인 CS 루이스의 견해를 빌린다면 욕구가 있다는 것은 욕구를 채워줄 실체가 있다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식욕이 있습니다. 식욕이 있다는 것은 배를 채울 음식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목마름이 있다는 것은 그 목마름을 채워줄 음료가 있다는 것이고 사랑 받고 싶다는 것은 그것을 채워줄 대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욕구가 있다는 것은 채워줄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욕구가 있다는 것은 반드시 그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요, 하늘나라요, 영원히 우리가 살 본향입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계시니까 하나님에 대한 욕구가, 마음이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23절에 인간의 소원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뿐만 아니라,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구속입니다. 진정 예수를 믿는 성도라라면 그 속에 구속의 날을 고대하고 기대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삶은 23절의 말씀처럼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 주님이 오실 그날을 간절히 기다리며 고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편하게 산다고 해도 고난이 있습니다. 속으로 우리가 신음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향한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분명히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고, 우리가 갈, 우리가 영원히 살 천국의 소망으로 살아갑니다. 이 땅에서 예수를 믿는 믿음, 하늘의 소망을 가지 살지만 우리 눈에 확실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흔들리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24-25절에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 참으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라고 우리를 향해 소망 가운데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생활은 소망생활입니다. 무엇을 소망하며 살아갑니까? 주님 다시 오실 날,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 땅과 비교할 수 없는 천국의 소망, 주님 만날 그 소망을 가지고 이 땅에 겪는 고난과 어려움, 우리를 신앙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유혹하는 세상의 유혹을 이기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ategory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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