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창세기 3:6-10
6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였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서 먹고,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니, 그도 그것을 먹었다.
7 그러자 두 사람의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어서, 몸을 가렸다.
8 그 남자와 그 아내는, 날이 저물고 바람이 서늘할 때에, 주 하나님이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 남자와 그 아내는 주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서,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9 주 하나님이 그 남자를 부르시며 물으셨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10 그가 대답하였다. “하나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제가 들었습니다. 저는 벗은 몸인 것이 두려워서 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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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금하신 선악과를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먹습니다. 선악과를 금하신 하나님을 의심하게 하고,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하는 사단의 유혹이 너무 달콤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6절을 보면 사단이 한 말을 듣고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볼 때 이렇게 보였다고 설명합니다.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였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서 먹고,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니, 그도 그것을 먹었다”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아담과 하와가 따 먹었을 때 어떠한 일이 생겼습니까? 하나님 처럼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7절을 보면 “그러자 두 사람의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어서, 몸을 가렸다”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0절을 보면 “저는 벗은 몸인 것이 두려워서 숨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7절을 보면 선악과를 먹었더니 “눈이 밝아졌다” 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보면 좋은 의미인 것 같지만 본문에서 보여 주는 눈이 밝아진 결과는 지혜가 충만하고, 모르던 것을 깨달아 기쁨과 환희가 있는 것이 아닌 수치와 두려움으로 숨게 된 것을 봅니다. 7절의 “눈이 밝아졌다” 라는 것은 자신들이 행한 일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지를 깨달았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눈이 밝아졌다” 라는 것은 하나님을 더 깊이 보게 된 것도 아니고 그동안 깨닫지 못하던 진리를 알게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7절에 그들이 눈이 밝아져서 보게 된 것은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신체 노출에 대한 인식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먹음으로 죄를 지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짐으로 인한 결과를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벗었다” 라는 의미는 무방비 상태, 보호의 상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지 못하는 존재,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존재임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눈이 밝아졌는데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불순종함으로 죄의 결과로 떠진 눈은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만을 보게 된 것입니다. 눈이 밝아졌다면 자유함을 누려야 하는데 수치와 두려움을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는데 하나님을 피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숨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7절을 보면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어서, 몸을 가렸다” 라고 말합니다. 죄의 특징은 자신의 죄를 가립니다. 왜 가렸겠습니까? 부끄러움 때문입니다. 몸을 가린다는 것은 수치를 가리려는 시도입니다. 타락 이전, 죄를 짓기 전에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숨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 죄 가운데 있으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두려워집니다. 담대함과 자유함이 없어집니다.
죄를 지은 후 나타나는 현상이 그래서 자기방어와 자기보호의 시작입니다. 몸을 가린다는 것은 “나는 안전하지 않다. 나는 스스로 내가 지키고 보호해야 한다”라는 생각입니다. 죄가 있기전 아담과 하와는 그러한 마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 책임져 주심을 받기에, 하나님과 거리낌 없는 사랑의 관계이고 아담과 하와 두 사람 관계 역시 사랑의 관계였기에 있는 모습 그대로를 다 받아주는 관계이기에 숨길 것, 가릴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 시대 죄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십시오. 자신을 포장합니다. 수십, 수백만원짜리 소위 명품이라는 옷이나, 가방, 시계, 브랜드를 사서 입고 들고 다니는 이유가 나를 가리는 것입니다. 내가 아닌 나를 다른 것으로 보이려는 것입니다. 자신의 허물과 죄, 연약함과 수치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서로 나누는 대화의 내용들은 거의 세상적인 정치, 경제, 드라마와 같은 것입니다.
대부분 나에 대한 부분을 나누고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비난하는 험담으로 대부분 대화합니다. 자신의 죄는 가리고 의인인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는 것으로 자신을 가립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신의 몸을 무화과 잎으로 엮어서 가리었습니다.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들어 가리운 치마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닌 인간이 스스로 만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수치와 죄를 ‘행위’로 덮으려는 시도를 의미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행위와 외적인 모습입니다.
무화과 잎이 다른 나무 잎보다 크지만 결국 나뭇잎은 완전하게 가릴 수 있지 못합니다. 나뭇잎은 쉽게 마르고, 쉽게 찢어지는 임시적이고 불완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죄를 가릴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어떠한 것도 없습니다. 도덕, 물질, 성공, 명예, 선행, 봉사, 종교적 행위 등으로 가릴 수 있는 것 같고 일시적인 위안은 주지만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곧 나누겠지만 하나님께서 나뭇잎이 아닌 가죽옷을 그들에게 입혀 주십니다. 가죽옷을 입혀 주셨다는 것은 곧 어떤 동물이 죽임을 당하여 가죽옷을 입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듯이 결국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죽음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 값으로 죽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입혀 주셨듯이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시고 그의 대속의 피로 우리를 덧 입혀 주심으로 죄 용서함을 받아 하나님의 관계가 회복되고 다시 서는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에게 하나님은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왜냐하면 죄를 심판하시는 심판의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에덴동산에서 사랑의 관계 속에 기쁨과 사랑, 감사와 평화 가운데 동행하며 지내던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숨게 되는 것이 선악과를 먹게 된 후에 일어난 모습입니다. 그래서 8절을 보면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습니다. 10절에 하나님께서 찾으시고 부르실 때 숨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숨는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성도들 가운데도 문제가 생기면, 더 나아가 해서는 안되는 말과 행동을 하고 난 후에, 또는 시험 들었다고 하면 숨는 것으로 해결하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 숨으면 잊혀지고, 해결된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숨는 다고 마음이 편해지지 않습니다. 덮어두면 더 곪고 썩게 되고 결국 나중에 더 심한 악취와 더러움으로 치료되기를 커녕 악화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서는 숨을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께 숨을 자가 어디 있습니까? 숨거나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와 내 보여야 합니다. 다시 말해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야 용서함을 얻고 치료와 치유,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아담과 하와는 자신의 힘으로 가리려고 했습니다. 숨었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의 죄의 징계를 받게 되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다시 한번 마음을 지키고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죄의 유혹을 말씀으로, 믿음으로 이길 수 있도록 늘 기도에 힘쓰시는 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더 나아가 죄를 지었을 때 가리고 숨기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하고 드러냄으로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자유함과 담대함 속에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