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마가복음 3:1-6

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런데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2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하려고, 예수가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를 보려고, 예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3 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가운데로 나오너라.”
4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그들은 잠잠하였다.
5 예수께서 노하셔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들의 마음이 굳어진 것을 탄식하시면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손을 내밀어라.” 그 사람이 손을 내미니, 그의 손이 회복되었다.
6 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은 바깥으로 나가서, 곧바로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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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신 사건입니다.
그런데 본문 4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시기 전에 회당에 모여 있는 자들을 향하여 이런 질문을 하십니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이 질문은 사실 너무나 쉬운 질문입니다. 당연히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고,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이 질문을 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보시고 과연 고쳐 주실 것인가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그들이 세운 규례에 따르면 안식일을 범하는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십계명 중 네 번째 계명이 “안식일을 기억하고 그 날을 거룩하게 지키라”입니다 당시 율법학자들은 이 계명을 어떻게 지켜야 할 지 머리를 싸매고 연구하여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들 39가지 규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각 규례에 무엇이 해당하는지 각 6개의 세칙을 만들어 모두 234개가 되는 안식일에 할 수 있는 일, 할 수 없는 일들의 대한 전통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 중에 안식일에 피를 흘리거나, 위급한 병자가 아닌 경우에 환자를 치료하는 일은 안식일을 범하는 행위라고 정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만약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친다면 안식을 범했다고 비난과 고발을 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 그들의 마음과 의도를 아시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본질, 즉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라고 질문한 것입니다. 즉 무엇이 진정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마음이며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은 어떤 모습이냐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신앙의 모습은 어떠한 것인지를 바로 알고 신앙생활하느냐고 질문하신 것입니다.

안식일의 정신, 더 나아가 참된 신앙은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세우는,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구원 받은 성도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가장 잘 안다고 하는, 신앙이 가장 좋다고 자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지도자라고 하며 가르치는 자리에 있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들이 규정한 규례의 잣대와 기준으로 선한 일을 하는 사람들조차 율법을 범했다고 정죄하고 비판하고 죽이는 일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 아셨기에 그동안 손을 쓰지 못해서 고통 받고 있는 자의 손을 안식일에도 고쳐 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한 일이요 좋은 일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정한 기준과 잣대를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들어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이 치료 받고 나음을 받을 수 있느냐에 관심이 아닌 예수님이 그 사람을 안식일에 치료할 것인가를 지켜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쳐 준다면 안식일을 범했다고 고발하고 정죄하겠다는 의도였습니다.

그런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하셨기에 예수님께서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시기 전에 질문한 것입니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예수님의 질문에 그들은 대답하지 않고 잠잠했습니다. 그래도 양심에 걸림이 있기에 대답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겉으로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신앙이 좋다고 자부하지만 선을 행하는 자들이 아닌 악을 행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6절을 보면 “바리새파 사람들은 바깥으로 나가서 곧바로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를 없앤 모의를 하였다”이들은 하나님을 믿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여전히 선이 아닌 악을, 살리는 것이 아닌 죽이는 일을 실행에 옮기려 한 것입니다.

왜 이들이 이렇게 선이 아닌 악을 행하는 자들이 된 것입니까? 그 답을 본문의 사건 속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의 사건은 안식일에 회당 즉 그 당시 예배를 드리는 장소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안식일, 회당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고 말씀을 듣는 자리였습니다.

바리새인들도 그 예배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이 어떠했습니까? 1-2절에“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런데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하려고 예수가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를 보려고 예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교회 안에서, 예배의 자리에 있으면서 그들의 마음과 목적은 예수를 고발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고발해서 무엇 하겠다는 것입니까?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지금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고 성도간의 사랑의 만남과 교제가 있는 교회 안에 들어 와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시대로 보면 교회의 집사, 권사, 장로 라고 하는 직분과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나름대로 신앙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들이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을 따라 선한 일, 사람을 살리는 마음이 아닌 예수님이 하시려고 하시는 선한 일, 살리는 일, 치료하시는 일을 못 마땅히 여기고, 더 나아가 해서는 안될 죄라고 비난과 정죄하려고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이 시대에 교회 안에서, 성도들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의롭고, 바르고, 하나님을, 교회를 사랑하고 위한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행하는 일들이 하나님의 뜻을 가로 막는 악한 일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안식일에 손 마른 자,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을 고치려는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해서, 정죄할 죄로 걸고 넘어지려고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6절을 보면 “바리새파 사람들은 바깥으로 나가서, 곧바로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였다”라고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원자 메시야이신 예수님,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분을 죽이는 일을 합니다.

스데반을 죽였던 바울도 그러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를 믿고 따르는 성도들과 교회를 이단으로 생각하여 영혼들을 구원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십자가의 복음,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선한 일을 극도로 거부하고 핍박하는 일을 하나님을 위한 일로 알고 행했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사명을 깨닫지 못하니까 내가 생각하는 중요한 것, 내가 정한 내 기준, 내 방법, 내 때에 어긋나면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하는 것조차 죄라고 비난하고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사울을 향하여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나의 길, 나의 사람, 나의 사명, 나의 뜻을 막고 방해하느냐?”라고 하신 것과 같이 자신이 행하는 일이 본문의 바리새인들과 같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달리셔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한탄하신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늘 기도하고, 질문해야 할 것은 내가 하는 일, 하고자 하는 일과 의도가 하나님이 기뻐하실 선한 일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하나님의 기뻐하실 선한 일인지를 생각하고 묻고 결정하는 것이 아닌 바리새인들과 같이 누군가 내가 정한 룰, 내 감정, 나를 불편하게 하는 행동, 내 마음에 들지 않기에 비난하고, 발목을 잡고, 정죄하는 주님의 선한 뜻을 막고, 핍박하는 미련하고 완악함의 죄를 짓습니다. 4절에서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라는 주님의 질문을 늘 기도함 속에 묻고 선한 일을 행하는참된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Category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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