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에베소서 1:1-2
1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나 바울이, [에베소에 사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2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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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로서 교회의 정체성과 성도의 삶에 대해 깊이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며,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심을 설명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하심과 구원은 우리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선물임을 분명하게 알려 줍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종과 민족이 하나가 됨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옛 생활을 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하며,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영적 싸움에 대비해야 함을 알려 주는 편지입니다.
오늘 함께 나눌 1-2절은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보내는 인사말입니다. 그러나 이 인사말에 에베소서의 핵심 내용, 아니 사도바울의 모든 편지의 핵심 내용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능력이 있는지를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를 이번주부터 강해해 나갈텐데 이 에베소 강해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깊은 깨달음으로 우리의 삶에 새로운 변화와 감격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사도 바울은 자신을 소개할 때 하나님으로 뜻으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고 소개합니다. 그러나 더 정확한 표현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얼마나 위대한 사도였는지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신약 27권 중에 13권을 쓴 사람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온 몸을 다 바쳤고 사도 바울로 인해 이방인들, 유럽과 아시아에 기독교가 전파 될 수 있었던 놀라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듯이 사도 바울이 사도 바울이 되기 전에 그는 사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되기 전 사울은 AD 1년경 다소에서 태어났습니다. 예수님과 거의 같은 나이였습니다. 다소는 지금의 터어키의 서쪽 바닷가 도시였습니다. 그 당시 교육의 중심지요 동양 문화와 서양 문화가 어울어진 곳이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의 직접 통치를 받는 곳이었기에 다소에 태어난 사울은 로마 시민권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부모는 텐트를 만든 사람이었지만 교육열이 강하여 아들인 사울을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보냅니다. 구약과 율법을 공부하게 합니다. 사울은 그 당시 가장 유명했던 가말리엘 문하에 들어가 율법과 구약을 공부를 합니다.
사울은 자신에 대해 자신만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육체, 가문, 학력을 자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기 전에 빌립보서 3:4절에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필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 가문과 학벌로도 종교적으로 완벽한 삶을 살았다고 자랑합니다.
가문과 학벌과 종교적으로 완벽하다고 하던 사울이 사도행전에 나타날 때 그의 모습은 어떠한 모습이었습니까?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로 나타납니다. 바로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산헤드린, 즉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바리새인들과 제사장, 사두개인들이 주축을 이루는 국회와 같은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모습을 책망하는 설교를 합니다. 사람들이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기 보다는 스데반을 밖으로 끌고 나가 돌로 쳐 죽입니다. 그때의 모습을 사도행전 7:58절에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 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스데반을 죽이는 일을 기획했던 사람, 돌로 치라고 한 사람이 바로 사울이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일에 나타납니다.
가문과 학벌과 종교적으로 완벽하다고 하던 사울이 사도행전에 나타날 때 그의 모습은 사람을 잡아 죽이는 모습이었습니다. 그의 눈은 매서웠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비판하고 죽이는 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사울은 스데반 한사람을 죽인 것 가지고 만족하지 않습니다. 온 예루살렘 교회를 핍박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모두 잡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사울의 핍박 때문에 예루살렘에 있던 믿는 자들이 도망했습니다. 사울은 도망한 사람들을 좇아가 다 잡아 죽이고자 대 제사장의 살인 허락 문서를 받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도망했다는 다메섹으로 좇아갑니다.
바로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사울이 바울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을 잡아 오려고 군사를 데리고, 대제사장의 문서를 들고 살기등등해서 말을 타고 가는 도중에 하늘에서 엄청나게 밝은 하늘의 빛을 보고 시력을 잃고 땅에 꼬꾸라집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큰 소리를 듣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너무나 놀라서 소리칩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라는 질문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사울은 좌절했습니다. 장님이 되고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됩니다. 내가 해 왔던 일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완전히 거꾸로 살았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죽였던 사울, 세상의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당장 죽여야 했습니다. 큰 벌을 내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사도로 선택하시고 쓰십니다. 아나니아에게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찾아 가서 안수해 주라고 하면서 사도행전 9:15절에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하나님께서 사울을 택하시고 하나님의 복음을 위한 그릇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사울이 바울로 변한 것입니다. 사울이 어떻게 바울이 되었습니까? 사울이 바울이 되고 하나님의 택한 그릇이 된 것이 사울의 공로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 앞에 올바로 살았기 때문이었습니까? 그래서 사도로 삼으셨습니까? 아닙니다. 바울의 간증은 “내가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였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1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거저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은혜로 인해 사울이 바울이 되었습니다. 사람을 죽이던 사람이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도 바울은 알았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요, 괴수인 자신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사도가 된 것을 알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편지에 항상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나 바울” 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도 바울에게만 아니라 바로 우리에도 주시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한 사울을 변화시킨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또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언제부터 사울이 바울이 되고, 언제부터 사람을 죽이던 사울이 생명을 살리는 바울로 변화되었습니까? 사울을 위대한 바울로 변화되게 한 것이 무엇입니까?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후부터였습니다. 자신의 노력과 열심히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후 부터였습니다. 저를 비록해서 여기에 계신 모든 성도님들은 변화되기를 원하는 소원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진정 쓰임 받기 원하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삶을 살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이제부터 내 마음이 더 넓어지고, 다른 사람을 더 품어주고, 더 말씀대로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품기도 하고, 내가 더 변화되기 위해서 노력도 해보고 결단도 해 보지만 그렇게 변화되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 내 자신에 대해 실망하고 갈등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변화되기 위해서 노력해 보고, 계획도 해 보고 결심도 해 보지만 잘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삶이 변화되기 시작한 때를 보면 계획을 세우고 결단하고 노력해서 된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깨달아지기 시작할 때 삶이 조금씩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좋은 것, 해야 할 것을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용서하고 사랑하고 이해하고 오래 참는 것이 좋은 것인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 못하는 것 아닙니까?
사도 바울의 간증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깨달아질 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격이 될 때. 그때 사울이 바울로 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 있기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자기의 모습을 바로 보지 못합니다. 내가 잘 난줄 알고, 내가 항상 옳은 줄 알고 늘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합니다. 사람을 죽이는 삶을 삽니다. 나름대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결국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합니다. 옆에 남편을 죽이고, 아내를 죽이고, 자녀를 죽입니다. 나름대로 사랑한다고 하지만 내 방법대로 내 뜻대로 하기 때문입니다. 아닌 체 하고 살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상관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십시오. 저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알게 해주십시오.” 은혜를 깨달은 사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곳에 평강이 넘칩니다. 기쁨이 넘칩니다. 사랑이 넘칩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이 오래참음의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끝까지의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유익이 아닌 남의 유익을 구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은혜를 깨닫고 은혜의 삶을 살 때, 사랑의 삶을 살 때 진정한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도 바울, 은혜를 깨달은 사도 바울, 그렇기 때문에 편지를 쓰는 모든 성도들에게 특별이 오늘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의 서문에, 아니 편지의 핵심으로 2절에 이렇게 씁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다른 것을 기도하지 않고, 다른 것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기를, 그 은혜를 통하여 평강의 삶을 누리기를 기도하는 사도 바울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