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33:18-23

18 그 때에 모세가 “저에게 주님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19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나의 모든 영광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나의 거룩한 이름을 선포할 것이다. 나는 주다. 은혜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불쌍히 여기고 싶은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
20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가 너에게 나의 얼굴은 보이지 않겠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21 주님께서 말씀을 계속하셨다. “너는 나의 옆에 있는 한 곳, 그 바위 위에 서 있어라.
22 나의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바위 틈에 집어넣고,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너를 나의 손바닥으로 가리워 주겠다.
23 그 뒤에 내가 나의 손바닥을 거두리니, 네가 나의 등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얼굴은 볼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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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시내산 위에 올라가서 구원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된 삶을 살기 위해서 지켜야 할 율법을 받고 있는 동안 산 아래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자신들을 인도한 신이라고 우상숭배의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노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쳐서 완전히 없애버리시겠다고 하셨지만 모세가 간절히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시고 내리시겠다는 재앙을 거두십니다.

그리고 33장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라고 명하시며 다시 한번 그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자신은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시자 모세가 다시 한번 간구함으로 뜻을 바꾸어 함께 올라가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대답을 듣고 모세는 18절에“저에게 주님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 라고 요청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확인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러한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확신할 수 있는 증거를 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모세의 요청에 하나님께서는 다른 증거가 아닌 하나님께서 그동안 보여 주셨던 성품을 다시 상기시키십니다. 그것이 19절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나의 모든 영광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나의 거룩한 이름을 선포할 것이다. 나는 주다. 은혜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불쌍히 여기고 싶은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가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속에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겨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구원한 하나님이며, 나는 주, 즉 모든 것을 주관하는 능력의 하나님이며 그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한 하나님임을 상기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19절에 “나는 주다. 은혜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불쌍히 여기고 싶은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 라고 대답하신 것은 다른 누군가 아닌 바로 지금 내가 이끌고 있는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고 그 백성에게 베푼 그 은혜와 사랑과 긍휼하심, 그 능력이 바로 나의 영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런 하나님의 성품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더 분명하게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실체,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마음을 아시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20절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가 너에게 나의 얼굴은 보이지 않겠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21-23절에 “네가 나의 얼굴은 보지 못하겠지만 나의 등을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얼굴을 볼 수 없고 등만 보여 주시겠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 말씀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습을 어느 정도만 보여 주시겠다는 뜻을 넘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인간의 한계, 그리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에 관한 중요한 영적 교훈을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특별히 가까이 교제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출애굽기 33:11절을 보면 “주님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이,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고 말씀하셨다” 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고 말씀하셨다는 표현은 물리적 얼굴을 뜻하기보다, 그만큼 매우 깊고 친밀한 인격적 교제를 나눴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모세가 하나님의 본질과 충만한 영광을 제한 없이 보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며, 전혀 죄가 없으신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에 이사야 6장을 보면 이사야가 성전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본 후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죄인 된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보기를 원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다 알기를 원한다는 의미인데 우리는 하나님을 다 알고,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로 다 이해하고 알기에는 너무나 크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시편 147:5 “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라고 고백하고 로마서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라고 고백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만났고, 그분과 친구처럼 대면하여 말하기도 했지만 그것으로 하나님을 다 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듣고, 배우고, 믿고, 안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다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하기 원합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수많은 이해하기 힘든 일들과 사건들, 악인이 득세하고 의인이 고통을 받는 일, 아무 죄가 없는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이 핍박을 당하는 일, 좁게는 내 삶에 일어나는 어떤 문제들,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왜 어려움이 왜 찾아오는지, 왜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 다른 길로 인도하시는지 알고 싶지만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다 이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이사야 55:8–9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생각과 길이 우리의 생각과 길보다 높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제한된 시각으로 오늘을 바라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전체를 아십니다. 우리는 눈앞의 문제만 바라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까지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얼굴을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신 뜻을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뜻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선하시고 신실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고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20장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전했을 때 도마가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예수님의 구멍난 못자국과 옆구리에 창자국에 자신이 직접 손을 넣어 보아야 믿겠다고 했을 때 도마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복되도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본문 21–2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한 장소를 정해 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지나갈 때 바위틈에 두시며, 자신이 지나갈 때까지 손바닥으로 가리워주겠다고 하시며 23절에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의 요청을 완전히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 얼굴, 모든 하나님의 뜻을 보여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음을 말씀하시면서 모세가 감당할 수 있는 방식, 즉 하나님의 등을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육체를 가진 우리들과 같이 하나님께서 손과 발, 얼굴, 등 과 같은 육신의 지체를 가지신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의 등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게 하시는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어느 순간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셨구나.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구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구나” 와 같은 깨달음이 있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대부분 시간이 지난 후에 깨닫습니다. 그것이 바로 22절에 “내가 다 지나간 후에 네가 나의 등을 보게 될 것이다” 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께서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왜 기도에 즉시 응답하지 않으시는지, 왜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후에야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깨닫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모든 사건의 의미를 나중에는 반드시 이해하게 된다고 약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세우시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도록 때에 따라 영적으로 하나님의 손길과 역사를, 하나님의 등을 보게 하시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모세가 요청한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얼굴을 보기를 원하다고 했을 때 하나님의 등만을 보여 주신 사건 속에서 우리가 다시 한번 붙들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응답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우리가 계획한 시간에 일이 이루어지고, 우리가 생각한 방법으로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우리는 한 문이 닫히면 실패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른 문을 여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다리는 시간이 고통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시간 동안 우리의 믿음을 성숙하게 하시고, 겸손하게 하시고, 하나님만 의지할 분이심을 깨닫게 하십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선하시고, 신실하시고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우리의 원하는 기대와 결과가 다를지라도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의 지혜보다 크시며, 지금 당장 내가 원하는바대로 보여 주지 않으시지만 여전히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보여 주신 후에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알지 못해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주시고, 더 많은 것을 보여 주시며, 더 빨리 응답해 주시는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이 더 은혜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지금 주시는 것보다 기다리게 하시는 것이 더 유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알려 주시는 것보다, 하루하루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시는 것이 더 유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우리의 한계를 아십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감당할 시험, 감당할 어려움만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며 의지할 때 우리를 보호하시고, 감당할 힘을 주시고, 피할 길도 허락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맡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모두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어떤 일을 행하실지도 모두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보여 주시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자신의 뜻에 따라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는 단순히 “하나님, 제가 원하는 것을 보여 주십시오”라는 기도가 아닌 “하나님, 제가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주님을 신뢰하게 하옵소서. 제가 원하는 길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가게 하옵소서. 제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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