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도행전 7:55-60

55 그런데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쳐다보니,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였다.
56 그래서 그는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하나님의 오른쪽에 인자가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57 사람들은 귀를 막고, 큰 소리를 지르고서, 일제히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58 그를 성 바깥으로 끌어내서 돌로 쳤다. 증인들은 옷을 벗어서,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
59 사람들이 스데반을 돌로 칠 때에, 스데반은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60 그리고 무릎을 꿇고서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다. 이 말을 하고 스데반은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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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은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하나님께서 선포하기를 원하시는 말씀을 공의회 앞에서 전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설명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들이 하나님이 뜻대로 살지 않는 죄를 범하였음을 상기시켰습니다. 그 죄를 알리고 책망하여 돌이켜 회복시키기 위해서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냈지만 거부하고, 핍박하고 죽였던 역사를 상기키시며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공의회 종교 지도자들도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원자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죽였던 죄를 책망한 것입니다. 회개하고 돌이켜 회복시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전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우리가 어찌할꼬” 하며 회개함으로 나아온 것이 아니라 스데반이 전한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렸지만 격분하고 이를 갈았습니다. 스데반을 향하여 적개심을 드러냈습니다. 우리가 알듯이 결국 그들은 스데반에게 달려 들어 성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쳐서 죽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첫 순교자가 된 것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참으로 안타깝고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과 4장을 보면 베드로도 많은 백성들 앞에서 설교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 역시 그 마지막은 스데반의 설교와 마찬가지로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구원자 메시야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한 큰 죄를 지었다” 라는 책망의 설교였습니다. 마음에 찔림을 주는 설교였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스데반의 설교에 비해 논리적이지도 않고 더 단순한 설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우리가 어찌할꼬” 하며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결과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의 설교는 베드로의 설교보다 훨씬 더 논리적이고 이해되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설교였지만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자들은 격분하고 이를 갈고 적대감을 드러냈습니다. 한번 설교를 했는데 돌에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스데반의 영성이 베드로 사도보다 적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잘못된 설교를 했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더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는 열매가 있어야 맞는 설교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이해되지 않는 결과였습니다. 사실 우리의 생각과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 수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도 사실 인간적인 기준으로 볼 때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시고, 능력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 모든 종교지도자들, 모든 권력자들조차 예수님을 구원자요 메시야로 인정하고 무릎꿇어 영접해야 맞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존귀와 영광을 받아야 할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조롱과 배신과 멸시를 받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는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시려는 유일한 방법이었음을 우리는 후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스데반의 죽음도 하나님께서 복음이 예루살렘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명하신대로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로, 사마리아로, 그리고 세상 끝까지 전파되도록 성도들을 흩으시려는 계획이었음을 우리가 깨닫습니다. 스데반의 순교가 시작됨으로 예루살렘 교회와 성도들에 대한 핍박이 시작되어서 성도들이 핍박을 피해 각 곳으로 흩어지게 되었지만 그 흩어짐을 통하여 예수님의 명하신대로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예수의 증인으로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스데반의 순교에 동참하여 돌을 던지는 자들의 옷을 맡아서 보던 사울이 바울로 변하여 놀라운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을 봅니다.

스데반은 성령의 충만함으로 복음을 전하다가 공의회 앞에 끌려와 담대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과 그들의 죄에 대해 선포했지만 그들이 자신에게 그렇게 적개심을 가지고 격분하고 이를 갈며 돌을 던져 죽일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을 통해 성령 충만한 스데반은 자신을 향하여 격분하고 이를 가는 사람들을 쳐다 본 것이 아니라 하늘을 쳐다 보았다는 것입니다. 55절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쳐다보니,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였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 인간의 생각, 죄성으로 가득차면 사람을 봅니다. 문제를 봅니다. 힘든 것을 봅니다. 나를 대항하는 사람,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바라봅니다. 그러면 나타나는 것이 미움, 원망, 불평, 정죄, 탓, 악한 마음이 들어 다투거나, 싸우거나, 험담하거나, 담을 쌓는 사단이 원하는 모습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문제를 보면 낙담하게 되고, 다른 사람을 탓하고 원망하게 되고, 근심하고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성령으로 충만하면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쳐다보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세상의 문제와 어려움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보고, 그 문제와 사람 뒤에 역사하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볼 때 사랑할 수 있는 힘, 용서하고 용납할 수 있는 힘, 더 나아가 축복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근심과 걱정이 아닌 감사와 기쁨으로 찬양할 수 있는 힘이 하늘을 바라볼 때 생기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을 죽이려고 달려들어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향하여 60절에 “ 무릎을 꿇고서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라고 외치는 기도함 속에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인간적은 기준으로 볼 때는 스데반의 설교는 아무런 능력도, 아무런 열매도 없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아무 힘도 없이 돌에 맞아 죽은 자 같았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기준으로 볼 때 진정한 성령 충만함의 모습이 바로 스데반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모습인 것입니다. 성령 충만함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말씀을 선포하고, 담대하게 죄에 대해 알리고, 마음에 찔림을 받은 자들이 회개함이 아니라 격분하며 이를 갈며 자신을 잡아 돌로 칠지라고 자신을 대항하는 자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하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바라 볼 수 있는 삶, 그로 인하여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삶이 성령으로 충만한 자의 삶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쓰시든 그 쓰임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삶, 찬송가 323장의 가사와 같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겠습니다. 멸시 천대 십자가를 제가 지고 가겠습니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 따라 가겠습니다” 라는 고백으로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성령 충만함의 삶, 스데반의 삶을 살아가기를 함께 기도하기 원합니다.

Category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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