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도행전 2:42

42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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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교회의 특징은 말씀을 배우는데 힘쓰는 교회였고 기도에 힘쓰는 교회였습니다. 그런 모습을 42절에 이렇게 알려 줍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 사도들의 가르침에 힘쓰는 모습과 기도에 힘쓰는 모습 사이에 “서로 사귀는 일” 이 들어가 있습니다. 개역성경에는 “서로 사귀는 일”을 “서로 교제하고” 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말씀과 기도에 힘씀과 함께 서로 사귀는 일, 교제하는 일에 힘썼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배우는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지게 만듭니다. 서로 사귀는 일, 즉 교제는 이웃과, 성도들과의 바른 관계를 가지게 합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의 관계만이 아닌 이웃과의 관계가 함께 해야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3천명이 넘는 성도들이 함께 하는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단지 숫자를 자랑하는 교회가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며 기도에 힘쓰는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그러한 속에서 성도간에 서로 사귀는 일, 교제하는 일이 잘 이루어지는 교회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가장 큰 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지켜 나가는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이 서로 교제하는 것은 성경을 배우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서로 교제함을 통하여 진정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보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교제라는 의미를 세상적인 의미로 착각하기가 쉽습니다. 성도간에 교제한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의 만남과 모임과 같이 단지 함께 만나서 먹고 이런 저런 세상 이야기, 정치 이야기, 가정사 이야기를 나누며 수다 떠는 정도로 생각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 가운데서도 성도의 교제를 예배 마치고 함께 식사하는 것이나 커피를 마시는 것 정도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교제는 다릅니다. 빌립보 교회에 보낸 사도 바울의 빌립보서의 말씀에서 본문에 나오는 교제라는 단어가 세 번 나옵니다. 교제라는 말의 그리스 말의 원어가 ‘코이노니아’ 라는 말입니다. 성경공부를 조금 하신 분들은 ‘코이노니아’라는 말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이 교제라는 정확하게는 ‘코이노니아’라는 말이 빌립보서 1:4-5절에 나옵니다. “내가 기도할 때마다 여러분 모두를 위하여 늘 기쁜 마음으로 간구합니다. 여러분이 첫날부터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에서 ‘교제’ 라는 의미의 ‘코이노니아’ 단어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교제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지 않고 다른 단어로 번역되어 있는데 그 단어가 바로 ‘동참’이라는 말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 하는 만남과 대화와 모임이 바로 진정한 교제라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복음에 사역에 처음부터 동참했습니다. 사역에 필요한 헌금을 보내는 일에 동참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의 사역을 위해서 중보기도에 동참했습니다. 재정적으로, 기도함으로, 마음으로 복음 사역에 동참한 것입니다. 복음의 사역을 위해 모이고, 모으고, 기도하고, 섬기는 모습이 바로 교제입니다.

성도들의 교제의 모임은 모여서 잘 먹고, 세상적인 이런 저런 이야기 나누는 모임이 아니라 복음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한명의 전도 대상자를 주님께 나오도록 함께 기도하고, 지혜를 나누고, 필요한 부분을 섬기는 것이 성도의 교제입니다.

빌립보서 2:1-2절에 또 다시 교제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무슨 격려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무슨 동정심과 자비가 있거든, 여러분은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이 되어서, 내 기쁨이 넘치게 해 주십시오” 빌립보서 1장에는 성도의 교제를 “복음의 동역, 복음에 동참” 이라고 되어 있고 2장에는 “성령의 교제”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간에 하나됨을 이루는 모임이 바로 교제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이 시대에 험담하는 모임, 원망하고 불평하며 누군가를 비난하는 모임, 미워하는 대화를 하는 모임이 많습니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이러한 악한 교제와 모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의 교제는 성령의 교제였습니다. 성령의 교제란 하나됨을 이루는 교제입니다. 격려와 사랑, 위로와 동정심, 자비함으로 한 마음, 한 뜻, 하나됨을 이루는 교제이고 예루살렘 교회와 성도들은 그러한 성령의 교제에 힘쓴 교회였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그러한 교회와 신앙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빌립보서 3:10절에 다시한번 교제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려 주는 단어가 나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1장에 나오는 ‘동참’이라는 단어가 교제입니다. 그런데 3장에는 무엇에 동참하는 것이 교제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바로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고난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고난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받으신 고난들이 있습니다. 거부함, 시기함, 미워함, 반대, 더 나아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받으신 조롱, 채찍, 매 맞음, 못에 박히심. 우리 또한 주님의 뜻대로 살 때 받는 고난들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왜 그런 고난을 자초하는지 모릅니다. “왜 그렇게 사냐? 왜 그렇게 희생하냐? 왜 그렇게 참냐?” 그런 그리스도의 고난을 받는 자들이 모여서 주님의 말씀과 약속과 하늘의 소망으로 위로를 받는 모임과 나눔이 바로 진정한 교제입니다. 그러한 삶이 진정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늘의 상을 쌓는 축복된 교제입니다. 이러한 교제가 저와 여러분의 삶과 교회에 있기를 함께 기도하기 원합니다.

Category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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