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갈라디아서 4:17-19

17 위에서 내가 말한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열심을 내는 것은 좋은 뜻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내게서 떼어놓아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자기네들을 열심히 따르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18 그런데 그들이 좋은 뜻으로 여러분에게 열심을 낸다면, 그것은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좋은 일입니다.
19 나의 자녀 여러분, 나는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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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에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사도 바울이 안질이라는 눈병이 있었고 인간적으로 볼 때 시험이 될만한 부족함도 있었지만 갈라디아 교회 성도가 된 사람들은 바울을 영접하고 환영했고 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순수하게 받고 믿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에 담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함으로 죄 용서함과 하나님의 자녀요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음을 믿고 감격하고 감사하며 바울을 사랑하고 그가 복음 사역을 할 때 도움과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감격과 기쁨으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던 갈라디아 교회에 유대에서 온 율법주의 자들이 들어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는 것은 말도 안되고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온전하게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는 가르침을 들었을 때 그들은 흔들렸고 결국 율법을 지키는 신앙으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다른 복음인 율법주의를 쫒게 된 이유를 17절에 이렇게 설명합니다. “위에서 내가 말한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열심을 내는 것은 좋은 뜻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내게서 떼어놓아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자기네들을 열심히 따르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율법을 따르고 지킴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열심을 내어 설득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열심은 좋은 뜻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에게서 떼어 놓으려고, 즉 자기네들, 즉 바리새파로 영입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파 사람들, 즉 율법주의자들은 자신들을 따르는 개종자를 만들기 위해서 열심을 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3장에 바리새인들을 책망하면서 저주하시면서 23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개종자 한 사람을 만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하나가 생기면, 그를 너희보다 배나 더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자신들을 따르는 사람들을 만들기 위해서 열심을 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열심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살리는 일이 아닌 지옥의 자식으로 만드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바리새인들, 율법주의자들이 갈라디아에까지 와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이 아닌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열심히 가르치고 설득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과 우리들에게 분별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열심은 잘못된 열심임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이단의 특징이 바로 열심입니다. 구원에 대해 잘못된 가르침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들이 가진 그 잘못된 구원의 방법을 진리인것처럼 목숨을 걸고 전하는 열심을 그들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 열심히 인해 믿는 성도들의 방향을 돌려 놓습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이단에 넘어가는 것을 우리가 보지 않습니까? 그들이 가진 열심은 하나님을 향한 구원을 받게 하는 열심이 아닌 그들 자신들과 단체와 교주를 위한 열심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돌아보아야 할 우리의 삶의 모습이 “나는 과연 무엇에 대한 열심을 내고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질문해야 할 질문이 나의 열심의 방향과 목적은 무엇을 위함이고 어디서부터 나온 열심인가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바리새인들과 같이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 열심을 내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희생하고 섬기는 열심인것 같지만 속 내면에는 자신의 의와 뜻과 원함을 이루기 위한 열심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인기, 인정을 위한, 내 사람을 만들기 위한, 내 명예를 얻기 위한 열심을 낼 수 있습니다.

나의 열심은 나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정말 하나님을 위한 것인가? 나의 열심은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열심은 진정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여 오직 주를 위한 섬김과 봉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놀라운 구원의 은혜에 빚진 자임을 기억하고 주님께서 명하신 영혼 구원을 위한 전도와 섬김, 영혼과 교회를 세우는 열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18절에 “그런데 그들이 좋은 뜻으로 여러분에게 열심을 낸다면, 그것은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좋은 일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바울에게 좋은 열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심히 있었습니다. 19절입니다. “나의 자녀 여러분, 나는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습니다” 바울의 열심은 한 영혼이 구원을 받는 것을 넘어 구원 받은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 모습, 인격을 닮아 하나님의 뜻대로 온전히 순종하는 성숙한 성도, 온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까지 아기를 낳는 산모가 해산의 고통을 참는 것과 같은 열심이라고 말합니다. 이 열심이 저와 여러분들의 열심히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이 시간 기도해야 할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열심, 복음을 향한 열심,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그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열심을 달라고 기도하기 원합니다. 나의 열심히 잘못되지 않도록 오직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심이 되어 영혼을 살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종으로, 성도로 세울 수 있는 열심을 달라고 기도하기 원합니다.

Category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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