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창세기 17:15-19
15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또 말씀하셨다. “너의 아내 사래를 이제 사래라고 하지 말고, 사라라고 하여라.
16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겠다. 내가 너의 아내에게 복을 주어서,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왕들이 그에게서 나오게 하겠다.”
17 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웃으면서 혼잣말을 하였다. “나이 백 살 된 남자가 아들을 낳는다고? 또 아흔 살이나 되는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18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아뢰었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으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19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아니다. 너의 아내 사라가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것이다. 아이를 낳거든, 이름을 이삭이라고 하여라. 내가 그와 언약을 세울 것이니, 그 언약은, 그의 뒤에 오는 자손에게도, 영원한 언약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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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셨던 약속의 말씀을 아내 사래의 이름을 바꿔 주시면서 다시 한번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주시는 말씀입니다. 1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또 말씀하셨다” 라고 하십니다. 또 말씀하셨다는 것은 이 말씀 이전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아브람이라는 이름의 뜻은 “높은 아버지”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뜻은 “많은 민족의 아버지”입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 혹은 그의 가족만 축복을 받고 누리는 자가 아닌 모든 민족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에 합당한 이름으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택함과 축복의 사람으로 부름 받은 자답게, 거룩하고 구별된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라고 명령하시고 그것을 상기하며 살라고 할례를 받으라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 후에 오늘 다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15절에 아브라함에게 “너의 아내 사래를 이제 사래라고 하지 말고, 사라라고 하여라”고 명하십니다. 그 이유를 16절에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겠다. 내가 너의 아내에게 복을 주어서,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왕들이 그에게서 나오게 하겠다” 라고 알려 주십니다. 사래라는 이름의 의미는 ‘여주인’이라는 뜻이고 ‘사라’ 라는 이름의 의미는 ‘열국의 어미’ 라는 뜻입니다.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이라고 부르신것과 동일한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 놀라운 축복의 약속의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17절을 보면 “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웃으면서 혼잣말을 하였다. “나이 백 살 된 남자가 아들을 낳는다고? 또 아흔 살이나 되는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라고 웃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웃음은 어떠한 웃음이었습니까? 기쁨의 웃음이 아닌 의심의 웃음이었습니다. 터무니 없는 말, 말도 되지 않는 말을 들었을 때 웃는 웃음이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심과 불신앙의 웃음이었습니다. 이러한 웃음을 창세기 18장을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아브라함의 장막을 찾아가 다시 한번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씀을 사라가 우연찮게 듣은 후에도 웃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이러한 아브라함과 사라와 같은 웃음을 웃지 않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너무 좋지만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그렇게 될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비웃는 웃음, 불신앙의 웃음 말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의 상황을 보면 그 웃음은 당연한 웃음이었습니다. 이제 그의 나이는 백 세에 가까웠고, 사라 역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씀은 듣기는 좋지만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이 엎드려 혼자 웃은 이유는 단순합니다. “이건 말이 안 된다” 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러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겠다고 하시고, 역사하시고, 해결해 주시겠다는 말씀을 들을 때 우리 마음 속에 “이 문제는 해결될 수 없어. 이 관계는 회복될 수 없어. 세상이 두 쪽 나도 안되는 일이야”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생각은 모두 현실을 기준으로, 인간적인 내 능력으로 판단할 때 나오는 결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현실과 상황을 기준으로 일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준으로 일하십니다. 그렇기에 17:1절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말씀을 시작하실 때 자신을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라고 알려 주시며 말씀하신 것입니다.
믿음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보이는 현실을 알면서도 그보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불가능해 보이지만 하나님께 말씀하시고 축복하시면 이루신다는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약하기에 아브라함처럼 불신앙의 웃음이 나올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도 그러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에게 골짜기에 깔려저 있는 수많은 마른 뼈들이 능히 살아날 수 있겠느냐고 하나님께서 물으셨을 때 에스겔에게 의심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에스겔은 현실적으로 뼈들이 살아나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았기에, 자신의 생각과 판단으로 답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에 대답을 맡긴 것입니다. 에스겔의 대답은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권능으로 회복될 것을 믿는 믿음을 반영한 대답인 것입니다. 우리의 대답도 그러하기를 원합니다.
지금 우리의 삶 속에 “불가능”이라고 느껴지는 영역, 문제, 기도의 제목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믿음은 상황이 바뀐 후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 그대로일 때 선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은 의심 속에서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웃음을 보시고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19절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아니다. 너의 아내 사라가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것이다. 아이를 낳거든, 이름을 이삭이라고 하여라. 내가 그와 언약을 세울 것이니, 그 언약은, 그의 뒤에 오는 자손에게도, 영원한 언약이 될 것이다”
이삭이라는 이름의 의미는“웃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의심의 웃음을 보셨지만 그 의심의 웃음을 진정한 믿음의 웃음, 기쁨의 웃음으로 바꾸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하나님,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 나의 의심을 믿음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더 굳건한 믿음으로 설 수 있도록 의심의 웃음을 기쁨의 웃음으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한 믿음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약속을 포기하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도 그 뜻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아브라함의 살아온 삶을 우리가 살펴보고 있지만 아브라함은 완벽한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믿음이 우리의 믿음보다 월등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와 동일한 의심이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아내 사라를 축복하시어 약속한 아들을 낳을 것이고,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왕들이 나오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데 인간적인 기준과 생각으로 “나이 백 살 된 남자가 아들을 낳는다고? 또 아흔 살이나 되는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라고 웃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답한 대답이 18절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아뢰었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으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으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들은 무슨 아들입니까? 어떻게 90살 된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십니까? 말 같지 않은 말 그만하시고 여종 하갈을 통해 낳은 이스마엘이나 축복해 주십시오” 얼마나 불신앙의 말이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대답입니까?
이스마엘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인간적인 방법으로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싶어 하면서도,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내 방법, 세상적인 방법으로 하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여전히 내 기준과 내 생각의 범위 안에서 믿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믿음에 바로 서지 못하면 눈에 보이는 방법을 선택을 하려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빠른 결과를 원합니다. 우리는 기다리는 것을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기다림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한 부족한 믿음, 부족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는 받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하나님의 명령대로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로 설 수 있도록 기다려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너의 아내 사라가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것이다”
하나님은 가장 정확한 때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약속하신 것을 이루십니다. 아브라함은 결국 기다림을 통해 약속을 받게 되었고 의심의 웃음을 기쁨의 웃음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사라는 나중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내가 하나님을 말씀을 의심했었는데 그 의심을 놀라운 능력으로 믿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 약속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굳게 세워지기를 원합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과 현실을 넘어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믿음, 우리의 부족함 속에서도 하나님이 일하심을 신뢰하는 믿음,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늘의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실 것을 믿는 믿음으로 기쁨으로 웃는 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