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빌립보서 4:1-3

1 그러므로 사랑하고 사모하는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인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이 주님 안에 굳건히 서 계십시오.
2 나는 유오디아에게 권면하고, 순두게에게도 권면합니다.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십시오.
3 그렇습니다. 나의 진정한 동지여, 그대에게도 부탁합니다. 이 여인들을 도와 주십시오. 이 여인들은 글레멘드와 그 밖의 나의 동역자들과 더불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나와 함께 애쓴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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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는 우리들은 하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삶의 주님으로 진정 믿고 영접하여 광야 같은 이 땅에서 기도와 말씀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뜻대로 하나님 말씀과 명령대로 살아가고자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하늘 시민권을 가진 성도는 광야의 길을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을 믿고 믿음으로, 감사함으로, 소망으로 걸어가는 자들입니다. 분명 이 땅의 짧은 광야의 삶을 마치고 죽음의 관문을 통과하면 우리를 구원하시고 사랑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맞아주시고 우리의 눈에 눈물을 닦아 주시고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으로 변화시키셔서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토록 행복하게 살 것을 확신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구원, 그 부르심, 영적 가나안 땅을 나 혼자만이 아닌 옆에 앉아 있는 성도들에게도 허락하셨습니다. 그 은혜, 그 사랑, 그 용서, 그 천국의 축복을 받아 주님의 사명, 복음을 위해 불러 모인 우리들이 교회입니다. 광야의 길을 서로 힘이 되고, 방패가 되고, 함께 가나안 땅을 정복해야 할 사명 공동체입니다. 영원토록 천국에서 함께 살 운명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우리는 영적 가족입니다. 영적 형제, 자매입니다.

그런데 가족이라고 다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습니까? 가족인데 마음에 들지 않는 자녀, 부모, 동생, 언니, 누나, 오빠, 형이 있습니다. 가족이 아니라 원수 같다고 느껴지는 가족들도 있습니다. 자녀들을 키우면서 마음 같아서는 발로 차서 쫓아내고 싶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얼마나 말을 안 듣고, 열 불나게 하는 일이 많습니까? 형제들 간에도 얼마나 다툽니까? 그런데 가족은 싸우고, 다투고 해도 그래도 가족입니다. 가족은 끊을 수 없는 관계, 포기하지 않는 관계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가장 힘들 때 보호해 주고 끝까지 편이 되어 주는 관계가 가족관계입니다.

성경은 교회를 영적 공동체, 영적 가족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사랑으로, 기도로, 서로 용납하고 하나됨을 위해 힘쓰기를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의 내용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동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관계를 위해서 우리가 함께 힘써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십니다. 1절,2절, 3절에 나오는 세 가지 동사를 보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1절에 굳건히 서십시오. 2절에 같은 마음을 품으십시오. 3절에 도와주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 우리가 함께 힘써야 할 첫째는 주님 안에 굳건히 서는 것입니다. 1절에 “그러므로 사랑하고 사모하는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인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이 주님 안에 굳건히 서 계십시오”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주님 안에서 굳건히 서 있으라”고 권면하십니다. 왜입니까? 내가 무너지고 쓰러지면 나만 무너지고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동체가 함께 무너지고 같이 쓰러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깨달아야 하는 것은 신앙생활은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라는 “공동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 신앙이 다른 사람의 신앙, 가정과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한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내 신앙에 무너지면 나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내 가정, 내 자녀, 내 곁의 성도들, 더 나아가 내가 속한 주님의 교회를 무너트리게 됩니다.

창세기를 보십시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같이 되겠다고 선악과를 먹는 죄로 무너졌습니다. 그 일로 인류가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의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온 피조물과 인류가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가인이 미움과 시기에 무너지니까 동생 아벨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부모의 마음을 찢어 놓는 고통을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갈을 통해 아들을 낳는 무너짐으로 민족간에 갈등과 싸움이 지금도 있습니다. 아간이 탐욕에 무너지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이 성 전쟁에 패하여 수많은 군사들이 죽임을 당하고 온 백성들이 낙담하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솔로몬 왕이 우상을 섬기는 죄로 무너지자 온 나라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나라가 갈라져서 남,북으로 싸우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반면에 요셉이 형들의 시기와 미움, 배신을 이기고, 보디발에 대한 분노와 복수를 이겼을 때 부모와 형제 모든 가족과 이집트, 그리고 주변의 수많은 민족을 구원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가나안 땅의 거인들과 높은 산성 앞에 무너지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선포하며 나갔을 때 이스라엘 온 백성들이 여리고 성과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차지하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단의 시험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 유대인들이 넘어트리려고 수많은 공격을 했습니다. 그러나 넘어지지 않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저와 여러분, 온 인류를 구원하실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나 한 사람이 무너지면 나만이 아닌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합니다. 하지만 나 한 사람이 무너지지 않으면 수많은 사람들이 축복을 누립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수많은 성도들이 신앙의 길을 가면서 사단의 유혹과 공격에 쉽게 넘어집니다. 자기 감정에 넘어지고, 육신의 편함에 넘어지고, 고난에 넘어지고, 물질에 넘어지고, 자존심에 넘어지고, 미움에 넘어지고, 자기가 세운 기준에 넘어지고, 섭섭함에 넘어지고, 시기에 넘어집니다. 넘어짐으로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이 분열되고 힘들어 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의가 서지 못합니다. 감당해야 할 사명을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축복의 역사가 멈춰집니다. 이스라엘 1세대들이 불순종으로 무너짐으로 바로 들어갈 축복의 땅,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40년이나 지체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내가 무너짐으로 힘 있게 전진해 나가고, 변화되고, 부흥할 수 있는 내 배우자가 제자리 걸음을 합니다. 고통스러워합니다. 내가 무너짐으로 힘 있게 부흥해 나갈 수 있는 교회가 무너져 내립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정착하여 축복을 누릴 수 있는데 발목 잡혀서 메마른 광야를 40년간 뺑뺑이 칩니다. 문제는 내가 굳게 서지 못하고 쓰러지고 무너져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내가 굳게 서지 못하고 쓰러짐으로 걸림돌이 되고 있는 사실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굳건히 서라”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굳건히 서야 합니다. 무너지지 말아야 합니다. 나 혼자의 문제가 아니라 가정과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사활이 걸린 일입니다. 굳건히 서라 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를 쓰러트리는 수많은 사단의 공격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분별하여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씀으로 승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굳건히 설 수 있는 것은 나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기에 설 수 있는 비결을 본문 1절의 명령 속에 알려 주십니다. 바로 “주님 안에 굳건히 서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있을 때 넘어지고, 쓰러지고, 좌절하지 않고 굳건히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기도 안에, 성령 안에” 있으라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말씀과 기도 안에, 성령의 충만함 안에 있을 때 사단이 우리를 무너트리려고 주는 생각, 유혹, 공격을 분별하여 물리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 하나님이 원하시는 관계를 위해서 우리가 함께 힘써야 할 일이 둘째,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2절 “나는 유오디아에게 권면하고, 순두게에게도 권면합니다.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십시오” 분명 빌립보 교회에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두 사람 사이에 갈등과 부딪힘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두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지는 성경이 분명하게 알려 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빌립보 교회의 리더들임에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서로 부딪히고 싸워서 갈등이 생겼고 반목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이상한 일입니까? 아닙니다. 사람들 사이에 갈등, 다툼, 반목이 생길 만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서로의 생각이 다르고, 취향이 다르고, 해석이 다르고, 원하는 것이 다르고, 성격, 개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 모두가 죄성이 있기에 해서는 안되는 말과 행동들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성숙하지 못하기에 내 감정, 내 기준에 맞지 않는 말과 행동을 누가 할 때 마음에 화가 납니다.

아무리 좋은 성격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마음 상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말과 행동들을 보게 됩니다. 그렇기에 한 마음이 된다는 것은 부부관계, 친구 관계, 더 나아가 교회 안에서도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시는 명령은 하나됨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기도했던 기도가 바로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저희도 하나되게 하옵소서”가 주님의 기도였습니다. “내가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처럼 사랑하라” 라고 주신 계명의 본 뜻은 사랑으로 하나됨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하나됨을 이루고,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하나님의 뜻,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서로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까? 저 사람과 나하고 잠시 인간적으로 마음이 맞을 수 있습니다. 잠시 좋아하는 것, 생각하는 것이 맞아서 한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인간적인, 세상적인, 우리의 기호와 생각들로 하나된 것은 얼마가지 않습니다. 반드시 어떤 일에 대해서 서로의 생각이 다르고, 서로의 의견이 달라서 부딪히는 일이 생깁니다. 그러면 누구 생각이 맞다고 주장합니까? 서로 자기 생각이 맞다고 주장합니다. 죄성을 가진 우리는 내가 맞다고, 네가 나에게 맞추라고 서로 외치고 주장합니다. 그러니 같은 마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을 2절에“내가 유두기와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라고 명령하지 않으시고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라고 명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대해 같은 마음이 되지 않고 삐걱될 때 주님의 마음, 주님의 뜻에 마음을 우선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들 가운데 교회를 사랑하고, 위한다고 하면서 서로 싸웁니다. 서로 다툽니다. 그렇게 싸우고 다투며 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됨이 우선이지요. 서로 화해하고 용납하고 사랑하는 것이 우선이지요. 다시 말해서 우리가 어떤 일을 의논하고 계획하고 결정하고 행할 때 내 agenda, 내 생각, 내 계획, 내 해석, 내 주장이 옳고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됨이 이루어지는지, 지금 이런 모습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고, 태도이고, 마음인지가 먼저라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즉 주님의 큰 그림, 주님의 명령, 주님의 뜻, 주님의 마음,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 아닌지를 분별하여 그 주님 뜻과 명령에 모두가 내려놓기 시작할 때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고 나아가야 합니다. 운영위원회는 목회자와 함께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고 나아가야 합니다. 목자, 부장, 제직들은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고 나아가야 합니다. 성도들은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고 한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같은 마음을 품지 못함을 회개하며 하나됨과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감당할 수 있는 낮은 마음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 하나님이 원하시는 관계를 위해서 우리가 함께 힘써야 할 일이 셋째, 도우라는 것입니다. 3절 “그렇습니다. 나의 진정한 동지여, 그대에게도 부탁합니다. 이 여인들을 도와 주십시오. 이 여인들은 글레멘드와 그 밖의 나의 동역자들과 더불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나와 함께 애쓴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서로 비록 다투고, 싸워서 갈등하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교회에 어려움을 주고 있는 본이 되지 않는 리더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도우라고 명하십니다. 어찌 되었든지간에 그들도 복음을 전하는 일에 애쓴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인간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고, 힘들게 하고, 꼴보기 싫은 모습이 있지만 서로 대적하고, 불신하고, 선을 긋고, 싸워야 할 대상이 아니라 도와서 함께 나아가야 할 생명책에 이름이 함께 기록된 형제 자매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붙잡아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함께 굳게 서고,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고, 주님 안에서 서로 도와야 할 관계라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 돕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돕는 것 내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굳게 서고, 같은 마음을 품고, 도울 수 있는 길은 주님 안에 거하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서로간의 갈등을 해결 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들, 서로 다른 모습들, 서로 수준의 차이가 나고, 나에게 상처와 아픔, 힘들게 하는 모습들을 어떻게 용납하고,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은 십자가 은혜를 붙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거기 어디 자존심이 있고, 갈등이 어디 있고, 나의 옳음을 주장하는 모습이 어디에 있을 수 있습니까? 원수된 우리를 사랑하셔서 화목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붙들을 때, 그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가 나를 사로 잡을 때 하나 될 수 있습니다. 도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힘으로는 사랑할 수 없고, 품을 수 없고,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그 사랑을 받으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압도하여 할 수 있게 이끄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품은 사람은 압니다. 우리를 왜 부르셨는가? 왜 공동체로 모이게 하셨는가? 왜 이 교회를 세우셨는가? 부르셨는가? 하나님을 위해서, 사명을 나누고 이루기 위해서. 이것을 감당하는 것이 행복이고 축복입니다. 결론은 결국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하나님의 시각으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영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측은히 여기는 마음, 도와 주고자 하는 마음, 기도해 주고자 하는 마음, 세워 주고자 하는 마음, 부족함을 채워 주고자 하는 마음이 부어질 때 되어 지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우리가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어떤 공동체보다 더 행복한 공동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Category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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