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열왕기상 1:5-10

5 그 때에 다윗과 학깃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아도니야는, 자기가 왕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후계자처럼 행세하고 다녔다. 자신이 타고 다니는 병거를 마련하고, 기병과 호위병 쉰 명을 데리고 다녔다.
6 그런데도 그의 아버지 다윗은 아도니야를 꾸짖지도 않고, 어찌하여 그런 일을 하느냐고 한 번도 묻지도 않았다. 그는 압살롬 다음으로 태어난 아들로서, 용모가 뛰어났다.
7 아도니야가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아비아달 제사장을 포섭하니, 그들이 아도니야를 지지하였다.
8 그러나 사독 제사장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나단 예언자와 시므이와 레이와 다윗을 따라다닌 장군들은, 아도니야에게 동조하지 않았다.
9 아도니야가 엔 로겔 가까이에 있는 소헬렛 바위 옆에서, 양과 소와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베풀고, 자기의 형제인 왕자들과 유다 사람인 왕의 모든 신하들을 초청하였다.
10 그러나 나단 예언자와 브나야와 왕의 경호병들과 동생 솔로몬은 초청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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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보면 교만함으로 망한 많은 사람들의 사건들이 나옵니다. 사울 왕이 그랬습니다. 처음 왕이 될 때는 “나 같은 자가 어떻게 왕이 될 수 있습니까” 라는 겸손한 마음으로 왕으로 세우려고 할 때 숨었던 겸손한 자였습니다. 겸손했기에 처음 왕이 된 후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함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많은 전쟁의 승리와 백성들의 칭찬과 인기에 취하여 교만한 자로 변해갔습니다. 전쟁에 승리하면 자신의 이름으로 비를 세웠습니다. 교만해지니까 하나님 말씀대로 온전히 순종하기 보다 자신의 생각하기에 더 좋은 쪽으로 불순종하고 타협하며 변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망하게 되었습니다.

열왕기상에서 우리가 살펴볼 많은 왕들의 모습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왕기상의 말씀은 다윗 왕이 늙음으로 그 후계자를 세우는 사건으로 시작하여 유다의 수많은 왕들의 삶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그런데 1장에서부터 교만함을 보이는 죄의 모습부터 보여 줍니다. 바로 다윗 왕의 네 번째 아들이었던 아도니야의 모습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다윗과 학깃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아도니야는, 자기가 왕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후계자처럼 행세하고 다녔다. 자신이 타고 다니는 병거를 마련하고, 기병과 호위병 쉰 명을 데리고 다녔다” 그 때에 라는 말은 다윗이 나이 들어 몸이 약해졌을 때, 죽음이 가까웠을 때입니다. 그러한 때에 아도니야는 자기가 왕이 될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후계자처럼 행세하고 다녔습니다.

다윗 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될 후계자는 솔로몬이었습니다.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겠다고 하신 분은 사실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아도니아는 아버지 다윗 왕이 늙어 힘이 없는 상황 속에서 스스로 자신을 높여 왕이 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후계자 행세를 하고 다닌 것입니다. 그러한 아도니야의 모습은 아버지에 대한 반역이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인 것입니다.

그런 모습이 바로 교만함의 모습인 것입니다. 잠언 18:12에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그리고 잠언 16:18절에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라고 알려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도니아의 모습을 통해서 교만함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우리의 삶이 교만함으로 망하는 자가 아닌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아도니아의 교만함은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교만함이었습니다. 아도니아는 아버지 다윗 왕이 후계자로 택한 아들이 솔로몬이라는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이미 솔로몬이 자신의 후계자가 될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고 그 사실을 솔로몬의 어머니인 밧세바와 제사장들, 그리고 그의 아들들과 신하들에게 알렸었습니다. 이것은 솔로몬의 어머니인 밧세바가 아도니야의 반역을 알고 다윗 에게 가서 한 말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1:17절입니다. “임금님, 임금님께서는 임금님의 주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시며, 이 종에게 이르시기를, 이 몸에서 태어난 아들 솔로몬이 임금님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될 것이며, 그가 임금의 자리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도니야는 아버지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기 동생 솔로몬을 후계자로 세울 것이라고 말하고 하나님 앞에 맹세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도니야는 그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자신 스스로 왕이 되겠다고 왕의 후계자 행세를 하고 점차 자신을 왕으로 세울 세력을 모으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를 생각하면 인간적으로 볼 때 자신이 훨씬 솔로몬보다 더 나은 후계자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은 다윗 왕의 넷째 아들입니다. 반면 솔로몬은 11번째 아들입니다. 그리고 솔로몬의 어머니는 아버지 다윗 왕이 신하 우리아의 아내였던 밧세바와 간음한 후에 우리야를 죽이고 아내로 맞아들인 여인입니다. 그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솔로몬입니다. 그런 솔로몬이 다윗 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죄를 용서하셨고, 그 밧세바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솔로몬은 축복 가운데 태어났다고 볼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솔로몬을 사랑하셨고 “여디디아” 라는 이름을 주시기도 하였습니다. 여디디아는 ‘여호와께 사랑을 입음’이라는 이름입니다. 그리고 솔로몬을 다윗의 뒤를 이은 왕이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 인간의 생각과 너무나 다를 때가 많습니다. 우리 생각과 기준으로는 말도 되지 않는 사람들을 택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감당하는 자로 세우실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바울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구약의 선지자들을 보십시오. 아도니아는 그런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따르고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교만의 죄입니다.

교만한 자의 특징은 둘째, 자신의 의를 믿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개역성경으로 보면 “그는 압살롬 다음에 태어난 자요 용모가 심히 준수한 자라 그의 아버지가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고 하는 말로 한 번도 그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라고 말합니다. “용모가 심히 준수한 자라” 외모가 특별났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자랐습니다. 행동에도 어긋남이 없는 반듯한 자였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의 아버지가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고 하는 말로 한 번도 그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도니야는 인간적으로 볼 때 어디 빠질데 없는 자였습니다. 그럴수록 교만한 마음이 자리잡기 쉽습니다. “내가 뭘 잘못했냐? 내가 못할 말 했냐? 내 말에 틀린 점이 있냐?” 라고 하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입니다. 자신의 의를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작은 잘못도 용납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의 부족함이나 실수를 배려하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을 받아 주고 높여 주면 견디지 못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첫째 아들의 모습이 바로 자기 의를 믿는 교만함의 모습입니다. 아버지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을 맞아주는 아버지를 못 마땅히 여깁니다. 동생에 대해 분노합니다.

우리가 왜 다른 사람, 다른 성도의 연약함을 너그럽게 용납하지 못하고, 꼭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의로워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너무나 좋은 일입니다. 나름대로 바르게 생활하는 것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내가 정한 그 의에 부합하지 못한다고 비난하고 정죄하고 용납하지 못하는 것은 교만함입니다.

우리는 절대 온전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절대 하나님 앞에 온전하고 의로울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영적인 눈으로 볼 때 우리가 얼마나 모가 나고, 모자라고, 미련하고, 교만하고, 문제 투성입니까?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시고 우리가 변할 소망을 가지고 오래 참는 사랑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 진리를 기억하고 다른 사람의 연약한 모습을 비난하고 정죄하고 무시하는 교만함을 버리기를 원합니다.

마지막으로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사람을 모읍니다. 아도니아의 모습을 보십시오. 자기 편이 되는 사람, 즉 자신을 왕으로 세워줄 사람들, 자신이 좋아하고 자신의 뜻에 맞는 자들만을 모읍니다. 7절을 보십시오. “아도니야가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아비아달 제사장을 포섭하니, 그들이 아도니야를 지지하였다” 그리고 9-10절을 보십시오. “아도니야가 엔 로겔 가까이에 있는 소헬렛 바위 옆에서, 양과 소와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베풀고, 자기의 형제인 왕자들과 유다 사람인 왕의 모든 신하들을 초청하였다. 그러나 나단 예언자와 브나야와 왕의 경호병들과 동생 솔로몬은 초청하지 않았다”

교만한 사람의 특징은 나뉨이 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적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나누었던 고린도 교회 안에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그리스도파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 원인이 바로 교만한 마음이 아니었습니까? 서로 자기가 더 옳다고, 의롭다고, 서로 비난하고 비판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가 교만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편을 짓지만, 겸손은 하나됨을, 회해함을 이룹니다. 교만함과 자기 의로 행하는 사람은 겉으로 볼 때는 되는 것 같습니다. 자기 뜻을 이루는 것 같습니다. 아도니아를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은 아도니아가 다윗 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들끼리 “아도니아 왕 만세”를 외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 모습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반역의 모습이었고 후에 아도니아는 그 교만함을 끝까지 내려놓지 못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반면 자격이 되지 않는 것 같고, 연약해 보이기만 하고, 아무런 인간적인 방법으로 왕이 되려고 애쓰지 않았던 솔로몬은 왕이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내 안에 아도니아의 교만함이 있지 않는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내 안에 교만함의 모습, 교만함의 마음이 있다면 회개하고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모습,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뜻과 때를 기다리는 순종의 모습이 있기를 원합니다. 베드로전서 5: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교만한 마음과 모습을 버리고 겸손함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섬기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ategory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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