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누가복음 23:32-34

32 다른 죄수 두 사람도 예수와 함께 처형장으로 끌려갔다.
33 그들은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서,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달고, 그 죄수들도 그렇게 하였는데, 한 사람은 그의 오른쪽에, 한 사람은 그의 왼쪽에 달았다.
34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제비를 뽑아서,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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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예수님께서 빌라도 총독에게 재판을 받으시고 아무런 죄를 찾지 못했지만 종교 지도자들과 그들에게 매수된 백성들이 예수님을 십자가 사형에 처하지 않으면 반란을 일으킬 것에 대한 위협을 받고 그들의 원함대로 십자가 처형을 선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성 금요일입니다. 그리고 본문의 말씀은 아무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하신 말씀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흉악한 범죄자에게 사형을 선언하고 사형을 집행하게 되는 십자가는 가장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사형 법이었습니다. 손과 발에 박힌 못에 온 몸의 무게를 지탱해야 하기에 숨 쉴 때 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껴야 했습니다. 목을 매 죽이는 교수형이나 단두대처럼 몇초에 죽는 것이 아닌 며칠간 십자가에 달려 그 고통을 받아야 하는 극악하고 잔인한 형벌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십자가에 달려 죽는 죄수들은 그 엄청난 고통을 견디다 못해 비명을 지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온갖 욕과 저주의 말들을 쏟아 부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저주와 고통의 십자가에 사형 선고를 받고 달리셨습니다. 하지만 다른 죄수들처럼 흉악한 범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아무 죄가 없지만 종교 지도자들의 시기로 인해, 빌라도 총독은 반란은 두려워하여 억울하게 달리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상황에서 그 고통스러운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그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마지막 말은 고통을 쏟아 놓은 비명이 아니셨습니다. 억울함에 분노하며 쏟아 놓은 저주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말씀이셨습니다.

34절 말씀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용서해 달라고 한 저들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시기한 사람들입니다. 정죄, 비난, 지금도 조롱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구하는 말씀을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시고 계시면서, 그 십자가의 고통을 온 몸으로 겪고 있는 상태에서 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용서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나에게 상처와 고통과 손해를 끼친 사람, 그것도 의도적으로 그렇게 나에게 고통을 주고 모욕을 준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으로’갚아주고 처벌해야 옳다고 말합니다. 아니 내가 받은 것보다 ‘두 배, 세 배’로 보복을 해야 시원하다고 하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나에게 그런 악을 행한 사람들을, 그렇게 억울한 피해를 당하고도 용서를 한다면 얼마나 이해되지 않는 일이겠습니까? 이해가 아니라 바보 같은 일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는 믿는 우리들에게 명하신 삶이 용서의 삶이었습니다.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실 때 주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마태복음 5:43-44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원수가 되게 된 그 일을 용서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용서함 없이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시고 명하셨던 말씀 그대로 십자가 위에서 원수를 사랑하는 용서의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을 통하여 우리 또한 그러한 용서의 마음과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성도들이기에 주님처럼 용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은 모두 용서를 어리석다 하여도 예수님의 제자 된 우리만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용서하며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용서해야 할 상대방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용서는 인간의 결단과 마음으로 할 수 없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주는 것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다면, 그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그를 위해서 충분히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고 생각하면 억울해서 견딜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옳고 그름을 따지기 시작하면 절대 용서의 마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내가 당한 일을 인간적으로 생각하고 붙들면 원망과 불평, 미움과 분노, 복수의 마음이 깊어집니다. 쓴 뿌리가 마음 깊이 내립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견고한 진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많이 명하신 명령이 기도하라는 명령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셔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기에 십자가 위에서 용서의 기도를 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깊은 기도함 속에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주시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용서하며 살아가려면 둘째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몰라서 그런다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2:8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 통치자들 가운데는, 이 지혜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이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무리들은 예수님이 인간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고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임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 분의 사랑을 몰랐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았다면 어찌 그들이 감히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34절에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잘못을 정당화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잘못한 것은 죄입니다. 해서는 안될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일을 무지하기 때문에 했다는 마음을 가질 때 정죄와 비난보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용서를 기도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기도가 나에게 잘못하는 자들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기 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용서하며 살아가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의지와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용서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결국 용서의 십자가였기 때문입니다. 죄인 된 우리를 위해,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 먼저 사랑으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그 모든 수모와 비난과 정죄와 매와 채찍과 손과 발에 못이 박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용서함을 순종하신 것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뜻이요 우리에게 명하신 명령입니다. 우리가 갚지 못한 죄에 대한 용서를 받았기에 우리 또한 우리에게 죄를 지은 자를 용서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용서는 내가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이 아닌 하나님의 명령임을 기억하고 용서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ategory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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