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누가복음 11:5-10

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누구에게 친구가 있다고 하자. 그가 밤중에 그 친구에게 찾아가서 그에게 말하기를 ‘여보게, 내게 빵 세 개를 꾸어 주게.
6 내 친구가 여행 중에 내게 왔는데, 그에게 내놓을 것이 없어서 그러네!’ 할 때에,
7 그 사람이 안에서 대답하기를 ‘나를 괴롭히지 말게. 문은 이미 닫혔고, 아이들과 나는 잠자리에 누웠네. 내가 지금 일어나서, 자네의 청을 들어줄 수 없네’ 하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의 친구라는 이유로는, 그가 일어나서 청을 들어주지 않을지라도, 그가 졸라대는 것 때문에는, 일어나서 필요한 만큼 줄 것이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구하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10 구하는 사람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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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이 주는 마음은 상대방을 끌어내리고 상대방의 약점을 찾고 상대방의 잘못과 실수들을 드러내려는 마음을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은 상대방이 잘되면 함께 기뻐해 주고, 상대방이 힘들고 어려움에 빠지면 안타까워하고 도와주고 싶고, 상대방이 부족하면 내가 채워주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령님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시고 성령으로 충만하면 그분이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필요가 보이고 그 사람을 어떻게든지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문제는 남을 도와주고 섬겨주고 이끌어 주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막상 돕고 사랑해 볼 라고 하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무력감이 듭니다. 저도 목사이기 때문에 원하든 원하지 않던 성도님들의 어려움들을 나름대로 듣게 됩니다. 어떤 성도님이 자신의 어려움과 문제를 이야기 듣다보면 해결 방법이 없습니다. 도와줄 길이 없습니다. 안타깝고 미안하기만 합니다. 저만 아니라 여러분들도 다른 사람들이 겪는 힘든 일들과 문제와 어려움을 듣다 보면 도울 길이 없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있을 때 우리가 100불 200불 보내준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잠시 위로나 조금의 도움이 될 수는 있어도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몸이 아파서 힘들어 하시는 분들만해도 그렇습니다. 맹장처럼 한번 떼어 내면 되는 수술이면 간단한데 만성적으로 몸이 아프신 분들이나 연세가 들어서 힘들어 하시는 분들을 직접적으로 도와 드릴 것이 없습니다.

그것을 알기에 어떤 분들은 자신이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내가 누구에게 말을 해 봤자 도움을 받지도 못하고 해결 방법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성도간에 구역에서도 말하지 않고 혼자 그 문제와 아픔과 어려움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분들도 계십니다.

이러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특별히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중보기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웃이 도움이 필요하고 문제를 해결 받아야 하는데 나는 그 사람을 도울 힘도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는데 내가 하나님에게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돕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도울 수 있는 능력도 없고 도울 수 있는 여력도 없지만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돕기를 구하는 것이 바로 중보기도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속에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기도의 방법을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한 사람이 밤중에 친구의 집을 문을 두드립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내 친구가 여행 중에 우리집에 왔는데 내 집에 먹일 것이 없어서 그러는데 빵 세 개를 빌려 달라”고 문을 두드립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안에서 무어라고 대답합니까?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과 나는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서 자네의 청을 들어 줄 수 없다”라고 거절합니다.

너무 냉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집 안에 있는 친구의 입장을 생각하면 이해가 갑니다. 그 당시 대부분 one bedroom에서 한 가족이 삽니다. 그 친구 집에는 어린아이가 있습니다. 겨우 재워 놨는데 불을 켜고 빵을 찾고 하면 분명 울 것입니다. 아기가 울면 누가 화를 냅니까? 엄마가 화를 냅니다. 가정싸움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친구임에도 거절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밖에서 그 친구가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면서 간청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8절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의 친구라는 이유로는 그가 일어나서 청을 들어주지 않을지라도 그가 졸라대는 것 때문에는 일어나서 필요한 만큼 줄 것이다”

이 비유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시기 싫으신데 우리가 계속 기도해서 귀챦게 구하면 주실 것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비유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친구의 관계에서도 간청하면 주는 것처럼 아버지 되시는 선한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하는 것을 반드시 주신다는 확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밤중에 빵을 구하기 위해 친구 집 문을 두들겼던 친구는 자기가 먹기 위해서 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행에서 늦게 도착한 친구가 배가 고프기 때문에, 또한 자기 집에 먹일 떡이 없기 때문에 다른 친구의 집에 가서 떡을 구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보입니다. 나는 줄 것이 없지만 줄 수 있는 사람을 알고 찾아가 구하여 받아서 주는 것이 중보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중보기도를 잘 하기 위해서는 첫째,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 주신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9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구하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구하는 사람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반드시 주실 것이라는 확실성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중보기도를 잘 하자면 구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가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외면하지 않으시고 들으신다는 기대와 믿음을 갖고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중보기도를 잘 드리기 위해서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확신과 믿음을 갖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중보기도를 잘 하기 위해서는 둘째, 상대방의 문제를 내 문제로 삼아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친구집에 와서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자신이 배가 고파서 떡을 빌려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배가 고프고 떡이 필요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자기 친구입니다. 자기 문제를 가지고 문을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우리가 눈을 돌려야 합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이 친구가 자기 친구를 위해서 밤중에 이웃 친구의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배고픈 친구를 먹이기 위해서 빵을 얻기 위해 늦은 밤에 떡을 달라고 문을 두드리는 친구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체면을 무릅쓰는 것입니다. 염치를 무릅쓰고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 겁니까? 친구의 문제를 내 문제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중보기도를 잘 하기 위해서는 어떤 분의 문제를 내 문제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서 중보하는 분들은 남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닌 내 문제라는 절박감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 그 분의 문제를 내 문제로, 나를 위해서 기도하는 간절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사실 그런 마음은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믿음이 성숙할 때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믿음이 성숙하지 않으면 그를 위해 기도의 자리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비난합니다. 정죄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지” 라고 판단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전하는 험담이나 말거리로 밖에 보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 성숙한 믿음은 다른 영혼들의 부족함, 연약함을 볼 때 하나님께 가지고 나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른 영혼을 위해 내 문제처럼 기도하기 시작할 때 사랑하는 마음이 더 생기고 성숙한 믿음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중보기도를 잘 하기 위해서는 셋째, 희생이 따라야 합니다. 친구를 위해서 다른 친구 집에 가서 빵을 구하는 이 사람을 보십시오. 빵을 구하기 위해서 밤 늦게 친구 집에 가야 합니다. 쉽게 줄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체면을 무릅쓰고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희생이 있는 것입니다. 나의 편안을 희생하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것뿐입니까? 친구 집 문을 두드리며 빵을 구하자 “나를 귀롭히지 말게 … 청을 들어 줄 수 없네” 라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이런 대답을 들으면 친구 같은 느낌이 드시겠습니까? 자기의 명예와 자존심을 희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뿐입니까? 이 사람이 귀챦다고 거절하는데 계속 달라고 문을 두드리다가는 친구를 잃을 위험이 있습니다. 자꾸만 와서 안된다고 하는데 계속 고집하는 사람을 보면 피하게 되지 않습니까? 친구를 잃은 희생을 감수하면서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응답하시는 기도에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희생이 능력입니다. 시간 날 때 기도하는 것은 중보기도가 아닙니다. 바쁘시더라도 시간을 내셔야 합니다. “꼭 교회에서 기도해야 하나?”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기도는 어디에서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전으로 나와 기도하는 것에는 희생이 들어갑니다. 희생한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할 때 능력이 나타나는 것처럼 희생의 기도가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남을 위해서 중보기도를 잘 하려면 희생이 들어가야 합니다. 중보기도 이것 일입니다.

우리가 중보기도를 잘 하기 위해서는 네 번째, 끈기가 있어야 합니다. 8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너나 주지 아니할찌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린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린 것이니라”구하라 찾아라 문을 두드리라 라는 동사가 반복 동사입니다. 계속해서 구해라 계속해서 찾으라 계속해서 두드리라. 우리에게는 끈기가 있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고, 진정으로 필요가 있고, 진정 하나님의 뜻임을 구하는 기도라면 우리는 끈기 있게, 포기하지 않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웃에 어려움을 겪고 계시는 분들,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시는 분들. 우리 교회의 필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부분을 내 문제로 삼아 기도하면 응답하신다는 확신으로, 사랑으로, 인내로, 끈기로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기도할 때 응답하시고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주변에 많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직접 도울 능력이 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분이시고 우리를 돕기를 원하는 시는 분이십니다. 주위에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서, 아버지 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있으면서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다며 그것은 죄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무엘 선지자는 나이 들어 자신의 삶을 백성들에게 말하면서 사무엘상 12:23에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치 아니하였다”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마음, 사랑의 마음으로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중보기도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일 아침 중보 모임, 토요새벽기도, 구역에 모여서 기도해 주십시오. 서로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아프신 분, 선교사님, 믿지 않는 분들, 믿음이 세워져야 할 분, 더 나아가 목회자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중보기도를 기뻐하십니다. 응답하십니다.

Category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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